2009년 10월 5일 월요일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한다는 의미는?

창세기 1장 2절에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한다는 뜻을 오해하신 분들이 있다. 버스 운행하듯이 하나님의 신이 운행하는 차원으로 생각하고 있으니 성경에 번역된 단어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은 인간의 지식과 이성의 판단으로 성경을 받아들이고 있으니 성경의 본질적인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이 갖고 있는 의도와 사상을 왜곡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부정보다 더 위험한 것은 왜곡을 의미하며 죄보다 더 위험한 것은 위선을 의미하고 있다면 눈으로, 귀로 드러난 죄와 부정을 보고 정죄하지 말라. 그런 죄와 부정보다 더 위험한 짓을 한 왜곡과 위선으로 불의한 행동을 하고도 그런 적이 없다는 식으로 살고 있는 종교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우리 주변에 살펴볼 수 있다.

오히려 종교를 갖고 있지 않는 사람들보다 종교를 갖고 있는 이들이 얼마나 더 도덕적이고 양심적이며, 법 없이 살 수 있는 존재들이 이 지구상에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종교를 갖고 있든 갖고 있지 않던 사람들의 마음 바탕에는 공허하고 혼돈하며, 흑암 가운데 있게 마련이다.

이러한 상태로 살고 있는 존재들이 발을 붙이고 있는 곳이 땅(하 에레츠)이란 곳이다. 사람들의 마음 바탕을 의미하는 땅이란 해석을 지구나 earth, globe, ground 등으로 이해하고 있으니 어떻게 하나님의 진의를 올바르게 알 수 있겠는가? 이런 식으로 알고 있으면서도 알고 있는 척하고 있으니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땅이 혼돈(토후 Whto) 공허(보후 Whb) 흑암(붸호세크)한 것은 인간의 마음 바탕 상태를 의미하고 있다. 본래 하나님의 생각으로 살아가도록 길을 만들어 주셨는데 그 길로 가지 않고 인간의 생각으로 만들어 놓은 길을 택한 상태를 ‘혼돈’이라고 한다.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 생명의 대로를 가지 않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쳐 자기 마음대로 가버리는 상황을 의미하고 있다.

육신의 생각으로는 하나님의 생명의 대로를 절대로 갈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갈 수 있다고 객기를 부리고 있는 상태가 바로 혼돈이다. 원래 똑바른 길인데 사람들은 비뚤어진 길이라고 착각하고 있기에 이 길을 생각하고 있는 사고부터 바르게 인식하지 못하면 갈 수 없는 길이다.

이 길을 죽음을 기초로 한 길로 죽지 않고서는 갈 수 없는 길이며 안내자가 없으면 갈 수 없는 길이다. 예수와 함께 죽지 않으면 갈 수 없으며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라는 안내자가 없으면 절대로 갈 수 없는 길이다.

죽지 않고 가려고 안내자 없이 갈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에 혼돈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 길이 성경에서 말하는 넓은 길이며 넓은 문인 것이다. 육적인 소욕을 죽이며 가야하는 길이기 때문에 좁은 길이며 좁은 문이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다른 방법으로 찾아오는 한 영원한 미로가 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참 생명의 없는 폐허가 된 마음의 상태가 바로 공허한 상태를 의미하고 있다. 하늘의 생명인 하나님의 사상으로 채워져 있어야 하는데 하나님의 것으로 채워지지 않는 상황을 뜻하고 있다. 하나님의 진리와 생명이 없이 하나님의 나라를 찾을 수 없으며 도달할 수 없는데도 찾아보겠다고 악만 쓰고 있는 꼴이다.

아무리 세상에 있는 것으로 채워본다고 애를 써도 채워지지 않을 뿐 아니라 채우면 채울수록 오히려 더 갈증만 느끼는 상황만 반복되는 것이다. 이 세상 어떤 지식으로도 알곡이 되지 못한다. 알곡처럼 비슷하게 가더라도 내용물이 거의 없는 빈껍데기만 되어 있는 상태가 바로 공허한 상태를 의미하고 있다.

참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그 분을 안내해주고 연결시켜 주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한다면 공허와 허무로 채워져 방황하게 될 뿐이다. 하나님의 참 생명이 없기 때문에 공허함을 메울 수가 없으며 육의 속성을 죽이기 위해서 참 선으로 행하고 고행을 시도하여 육의 속성은 죽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진정한 죽음의 기초가 되지 못한 채로 허무한 인생만 되풀이 될 뿐이다.

이러한 상태가 된 것을 흑암의 상태, 길과 진리와 생명이 없는 상황을 빛이 없는 상태로 볼 수밖에 없다. 아무리 교회를 다니고 예수를 믿고 해도 길을 찾지 못하고 진리와 생명을 얻지 못한다면 수십 년 신앙생활을 해도 소용이 없다. 이것을 찾지 못하고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단 집단을 찾아가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이 교회 안에 들어와서 신앙생활하게 되면 구원받고 천국가게 되며 영생을 얻는 줄 착각하고 있다. 무작정 예수 믿으면 되는 줄 알지만 너무나 모르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심연 속에 자리 잡고 있는 마음 바탕에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걷혀지지 않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아 놀라운 경험을 했다고 하더라도 마음속에 있는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세력을 깨드리지 않으면 하나님과 악수를 해도 소용이 없다는 깨달아야 한다. 사도행전 16장 간수가 감옥 안에 있는 바울과 실라에게 등불을 달라고 한 것은 그냥 단순히 등불을 달라고 한 차원이 아니다.

생명의 길을 갈 수 있는 빛, 진리와 생명을 알 수 있는 빛을 달라고 한 간수의 애절함이 무엇인지 깨달아야 한다. 그것을 주기 위해서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는 차원이 무엇인지 지금도 간절히 찾고자 하는 영혼들이 얼마나 많은지 교회는 알아야 한다.

그런데 상담해 주면 되는 줄 알고 상담소를 설치하고 안수기도해주면 되는 줄 알고 아무데나 손을 얹고 기도하면 되는 줄 안다. 교회 오면 먹여주고 재워주며 용돈이나 줘서 신앙생활하게 되면 다 된 줄 착각하지 마라. 한 영혼이 혼돈과 공허와 흑암에서 벗어나는 과정이 얼마나 긴 터널처럼 지나와야 한다.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는 것을 잘 묘사하고 있는 구절이 있다. 신명기 32:11~ 12에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여호와께서 홀로 그들을 인도하셨고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에서 헤매고 있는 사람들이 길과 진리와 생명 그리고 빛을 찾고 있는 모습이 마치 독수리 새끼가 배가 고파서 어미에게 먹이를 달라고 입을 벌리고 있는 곳에 먹이를 주기 위하여 어미 독수리가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독수리 새끼가 날개를 펴서 나는 것을 연습할 때 날개 위에 펴서 새끼를 받으며 업는 모습을 연상케 하는 장면이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혼돈과 공허와 흑암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도록, 생명과 진리로 채워질 수 있도록 빛 가운데로 인도함을 받을 수 있도록 지금도 날개 짓을 치며 우리에게 먹이를 주며 저 푸른 상공을 날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있다. 그런데도 다른 곳을 찾고 있으며 엉뚱한 곳에다 기웃거리며 돌아다니고 있다.

방황의 끝자락에서 주저하고 있는 우리 앞에 막아서서 날개 치며 우리를 인도하고 있는 하나님의 모습이 신명기 32장 전반에 걸쳐 보여 주고 계신다. 아니 성경 전체에 걸쳐 우리에게 먹이를 주고 우리의 앉고 서며 행동하는 모든 것을 주시하고 관찰하며 우리가 마음껏 창공을 날아다닐 수 있기 전까지 도와주시는 하나님의 신이 수면 운행하시는 은총을 거부하지 말라.

여기서 하늘 창공을 마음껏 날개를 치며 돌아다닌다는 것은 비행기를 타거나 아니면 구름을 타고 돌아다니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만드신 하나님의 세계 구석구석을 맛보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영적 세계를 제 4차원이라는 개념을 의미하는데 주님과 한 몸으로 연합되어 신앙 생활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와 한 몸이 된 상태가 바로 하늘이라는 개념이라면 연합된 상태로 된 상황에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창공을 날아다니는 삶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땅에 것을 찾지 말고 위에 것을 사모하라는 말씀이 바로 이 말씀인 것을 깨달아야 한다.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는 것이 무엇이겠는가?(빌 3:14) 죽고 난 뒤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천국에 가서 얻어지는 것이 결코 아님을 직시해야 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 한 몸으로 이루어진 가운데 얻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신이 수면 위에 운행하는 것이 창세기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다. 지금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내 안과 밖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되어야 한다. 우리를 세심하게 보살피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오늘만 맛보는 것이 아니라 내일도 그리고 계속 진행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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